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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출신 조용기 목사 (3) “조용기와 최자실의 만남”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목사는 신학교 학생회장과 전도부장으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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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포스트
기사입력 2020-09-20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태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목사의 만남에서 출발하게된다. 서울 서대문구 대조동 깨밭에 세워진 천막교회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목사의 만남은 예수와 수가 마을 여인의 만남만큼이나 절실한 것이었고 어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베드로와 바울의 만남만큼이나 위대한 만남이었으니,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소명이 있었다.

 

 조용기 목사는 조두천 장로와 김복선 권사의 54녀 중 장남으로 19362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에서 태어났다. 언양국민학교를 마치고 부산의 부산공업중학교를 다니던 당시 조용기 학생은 갑작스러운 폐병으로 그의 삶에 어두움이 드리워졌다. 당시 폐병은 전염성이므로 가족들과도 격리되어야만 했고, 그래서 그는 병마와 함께 외로움과도 싸워야 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의술을 총동원했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그 때 그에게 누나의 친구가 전해준 것이 성경이었다. 조용기 목사가 처음 복음을 접한 순간이기도 했다.

 별다른 차도가 없어 다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온 조용기 목사는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켄 타이스 선교사가 천막을 치고 부흥회를 인도하는 것을 보았다. 들려오는 말에 이끌려 천막에 들어선 조용기 목사는 그 곳에서 선교사의 기도에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맛보게 됐다.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통곡하고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됐다. 부흥회를 마치고 선교사와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됐는데 켄 타이스 선교사는 조용기 목사의 영어실력에 깜짝 놀라며 통역을 부탁하게 됐다.

 

조용기의 천재성은 역시 탁월한 어학 실력이었고 그의 탈렌트를 발견하고 금일의 세계적인 부흥사로 또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게 해준 은인은 바로 켄 타이스 미국 선교사였다. 이후 조용기 목사는 선교사를 따라 다니며 그의 설교를 통역하게 되는데, 통역을 하며 말씀을 이해하게 되고 신유체험에 대한 간절한 소망도 생기게 됐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를 시작하게 됐다. “하나님 정말 당신이 살아 계신다면 제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아닌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오늘밤이라도 주님이 저에게 현현해 주신다면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며 일생을 바치겠습니다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한지 사흘 때 되던 날 새벽 2시경 인기척에 잠을 깬 조용기 목사는 흰 옷을 입은 사람의 형체를 보게 되는데 처음에는 아버지인줄로 착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아버지가 아닌 선교사가 말한 그 예수님임을 확인한 그는 깜짝 놀라게 됐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손을 얹으시고 병을 고쳐줄테니 평생 내 종이 되겠느냐?’라는 질문에 네 저를 치료해주신다면 평생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습니다라고 그는 고백했다. 일순간의 체험이었지만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구원의 확신을 얻고 폐병에서 자유함을 얻는 조용기 목사가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대형교회, 세계 최대의 단일교회로 불리는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순복음교회) 62년의 역사는 조용기 원로목사의 가족사이기도 하다.

순복음교회의 시작은 초라했다. 1958518일 서울 서대문구(지금의 은평구) 대조동의 허름한 집에서 5명의 개신교인이 올린 첫 예배가 순복음교회의 출발이었다. 당시 예배를 이끌었던 두 명은 조용기 목사와 훗날 그의 장모가 되는 최자실 목사였다. 나머지 3명의 교인은 최 목사의 세 자녀인 김성혜·성수·성광 등이었다.

 

조 목사는 최 목사와 함께 대조동에 천막교회를 건립하며 교회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순복음교회가 본격적인 성장을 거듭한 것은 19738월 교회를 서울 여의도로 옮긴 뒤였다. 여의도에 처음 교회를 세웠을 때만 해도 8000명 수준이었던 순복음교회의 신도 수는 19791010만명을 돌파했다. 순복음교회는 198220만 신도를 돌파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로 주목받았고, 3년 만인 1985123150만명으로 신도 수를 늘렸다.

  순복음교회가 이처럼 짧은 기간에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3박자 구원론등을 내세워 대중을 사로잡은 조용기 목사의 카리스마 덕분이라는 분석이다. 방인성 함께 여는 교회목사는 조 목사는 순복음교회를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예수를 잘 믿으면 영혼은 구원을 받고, 하는 일마다 잘되고, 건강도 지켜낼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옳고 그름을 떠나 종교를 통해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질병을 다스리고자 하는 대중의 요구를 잘 포착해 그들에게 다가간 것이라고 말했다. 순복음교회에서는 이를 영혼이 잘되는 축복 범사에 잘되는 축복 강건하게 되는 축복의 삼중 축복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순복음교회 성장의 또다른 배경에는 조 목사의 장모인 최자실 목사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이와 관련해 순복음교회 50년사는 최자실은 신학교 졸업 후 믿음의 어머니로서 조용기가 목회를 시작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주고, 평생을 다 바쳐 조용기 목사의 목회사역에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할렐루야 아줌마 최자실의 출생과 성장

최자실은 1915년 8월 15일 황해도 해주군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지병으로 최자실이 6세 되던 해에 사망하여 홀어머니 아래에서 성장 하였다. 가세는 기울고 어머니의 삯 바느질로 어려운 생활을 이루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 친구의 전도를 통해 천막 부흥회를 참석하게 되었다. 그 부흥회는 이성봉 목사가 강사였는데 이성봉에 영향을 받은 최자실은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까지 교회로 인도하여 신실한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그 어머니는 평생 새벽을 깨워 기도하였고 주의 종을 얼마나 잘 섬겼던지 어릴 때부터 주의 종 섬기는 훈련을 잘 받았다고 그의 자서전 속에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삶은 늘 돈을 벌어 어머니의 고생을 덜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해서 동급생의 가정교사 자리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후에 숙명여자고등학교로 발전된 명신 여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두고 평양 도립 병원 간호원 양성소에 들어가는 입학시험에 응시했다. 그때 당시에는 경쟁률이 꽤 높았다고 하는데 기도하는 가운데 합격하여 드디어 직장여성이 된다. 그는 어려운 살림을 돕고 환자를 돌보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 생각하며 일에 몰두하였다.

결혼이후의 생활[

청년시절의 최자실은 한경직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신의주 제2장로교회에 출석하였는데 같은 교회의 찬양 대원이며 후에 배재고등학교가 된 배재학당을 거쳐 일본 주오대학 법과 (법과대학)를 졸업한 김창기와 26세때 결혼을 한다. 그러나 결혼 후 남편은 교회출석을 등한히 하고 세상일에만 분주했다. 처음엔 권유도하고 간청도 했지만 나중에는 본인도 두 딸과 두 아들을 키우며 점점 신앙생활을 멀리하게 된다. 그러나 부흥회를 통해 지난 5년 간 지었던 불신앙의 죄를 통회 자복하며 회개한다. 나중에 최자실은 서울로 내려오게 되는데 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 성냥공장과 비누공장으로 큰 돈을 벌고 사업이 더 확장되어 전국적인 사업을 해 성공을 거둔다.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사업에만 몰두하게 되고 또 신앙은 나락에 떨어지자 어머니는 밤마다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하고 있었다.

시련의시련

승승장구하던 최자실에게 시련이 닥치기 시작했다. 1953년 기도의 어머니가 69세에 소천하고 열흘 후에 맏딸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많던 재물도 사업실패로 다 날아가고 심장병이 발병하고 모든 것을 상실한 비참한 상황이 찿아왔다. 가정불화, 빚장이들의 독촉 등 말할 수없는 고통속에 수년이 지나고 나니 삶을 포기 하기에 이른다.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극약을 산 다음 지금의 북한산 자락인 삼각산으로 올라 극약을 마시려는 순간 난데없는 돌개바람이 불어 약봉지가 날아가 버려 자살에 실패하고 거듭 자살을 시도했지만 이루지 못하고 그곳에서 놀라운 변화를 맞는다. 그러나 자살을 시도했던 곳 부근에서 30년 만에 우연히 어릴 적 친구의 권유로 참여했던 부흥회의 강사였던 이성봉 목사의 집회가 열렸고 그 곳에서 예수를 만난다. 자살하기 위해 올랐던 그 곳이 놀라운 새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었던 것이다.

사역으로 입문 과정

그녀는 산에서 내려온 후 이성봉 목사를 찾아간다. 이성봉 목사의 소개로 현재의 한세대학교로 발전한 순복음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녀는 이곳에서 조용기 목사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신학교시절부터 조용기와 한 팀을 이루어 전도와 기도 등으로 미래 목회를 포문을 열게 된다. 그때 신학생들은 방학 중에도 학교에 나와 철야하며 기도했다고 한다. 그들은 학문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실천도 하였다. 특히 최자실의 신학교시절은 기숙사생활을 하면서 밤새 철야기도를 하고 시간만 나면 노방전도를 하는 전도자의 생활이였다.

그의 첫 번째 사역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온 동리를 다니면서 아이들을 불러 모아 놓고 알사탕을 사주어가며 찬송가를 가르쳐 주고 성경말씀을 가르쳤다 그리고 한 차례씩 껴안고 안수기도를 해 주었다.이렇게 모인 아이들이 60 ~ 70명씩 모이자 불광동에 천막교회를 세웠다. 처음 천막교회를 개척했던 이곳에서 아이들로 시작된 예배와 최자실 전도사, 조용기 전도사 그리고 최자실 전도사의 딸 김성혜와 아들 김성광 그리고 비를 피해 왔던 할머니 총 5명으로 출발했던 장년예배도 최자실 전도사의 소문을 듣고 한두명씩 모이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망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먹을 것을 나누고 기도를 통한 신유의 역사로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당들이 회개하고 주정뱅이들이 변화되는 갖가지 역사가 일어나니 최자실 전도사 혼자 감당치 못해 조용기 전도사에게 사역에 협력을 부탁한다. 이후에 조용기 전도사의 설교를 통해 많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불광동 천막 교회는 1958년 6월 5명으로 출발했던 재적교인이 꾸준히 5백 명으로 늘어 1961년 11월 천막교회 개척 3년 만에 서대문구 의주로에 순복음 중앙 교회를 개척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연일 더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조용기 목사의 설교와 최자실 전도사의 치유 사역 등으로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나타났고, 동북아시아 세계 선교 대회를 주최하는 등 세계적인 규모의 성회를 주최하며 최자실 전도사의 사역은 이제 세계를 향해 나갔다 다시 곧 돌아온다.

참고로 서대문 순복음 중앙 교회 건물은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으로 편입되었으며, 서울 충정로 우체국 부근에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총회 회관과 바위샘교회로 사용되고 있다.

순복음 기도원 건립

기도의 동산을 세우는 꿈을 갖고 있었던 최자실 전도사는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오산리에 위치한, 교회 묘지의 연장창고에서 철야 기도의 제단을 쌓은 지 석달 째 되던 날 응답받고 기도원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기도원 집회를 인도하며 수많은 사탄의 방해 공작가운데도 기도로 세계 최대 규모의 기도원을 설립하였다.

후에 최자실 목사가 소천한 뒤, 눈물 어린 기도와 헌신을 기념하여 기도원의 정식 명칭을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금식 기도원'으로 변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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